1.
신은 최고로 행복한 상태이며 인간세계에 영향끼치지 않으므로 인간 자신에 의해 행복이 좌우한다고 보았다. 또한 사후에 신의 심판을 받지 않으므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자유의지의 단초를 삼는다.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행복추구의 방안을 제시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물이 목적을 가지며 이를 실현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목적론을 제시하며 인간만이 이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여러 과학자들은 목적론에 대해 비판한다. 그러나 우드필드는 목적론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수 없기에 목적론이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7세기 과학적 설명의 중요성이 커지며 물질론이 떠오르게 되었고 이는 환원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물이 물질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본성이 단순히 환원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반박하였다.
3.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한다는 그림이론을 주장한다. 이에 어떤 명제가 의미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 그 명제가 실재하는 대상에 대해 언급해야 하고 경험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명제여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 명제나 질문들은 경험 가능하지 않은 대상들이기에 이에 대한 논의가 의미없는 말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4,
신채호는 아와 비아의 개념을 제시하여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또한 아를 소아와 대아로 구분하여 대아가 자성을 자각한 후 항성과 변성의 조화를 통해 상속성과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조선민족이 신국민이 될 때 민족 생존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조선민족인 아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는 동양주의에 대해 반대하였다. 식민지배가 심해질수록 조선민중을 아의 중심에 놓으며 민중연대를 중요시 여겼다.
5. 율곡은 이기론을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하고 이와 기는 항상 더불어 존재한다는 이기지묘를 주장한다. 또한 성인과 일반인은 동일한 이를 갖기에 일반인이라도 기질상의 병폐를 제거하고 탁한 기질을 정화하면 이를 회복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율곡 이이는 법제 개혁론을 주장하여 폐단이 있는 법령들을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6.
이익은 아담 샬의 영향을 받아 뇌가 몸의 운동을 주관한다는 것은 긍정하였지만 지각활동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고수하였다. 이후에도 서양 의학에 대한 적은 필요성, 부족한 내용, 윤리적 문제 등과 같은 이유로 서양 의학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되었다. 그 후 최한기는 전체신론의 영향을 받아 신기를 신체 운동의 원인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신기를 통해 온갖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7.
(가) 과거제는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시행되므로 공정성의 강화를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과거제를 통해 교육의 확대와 지식의 보급,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방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여 경쟁적 선발제도를 완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천년 넘게 시행된 과거제는 관료제에 기초한 통치의 안정성에도 기여하였다.
(나) 유형원의 공거제 구상은 과거제의 문제점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과거제는 형식적 학습을 조장하고 많은 인재들의 재능 낭비 현상,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능력주의적 태도는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결과와 개인적 동기가 공공성과 상충되는 현상이 나타났기에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8.
(가) 박제가는 청의 현실을 조선의 발전방향으로 보고 청 문물제도로 인한 이익 추구를 인간의 자연스로운 욕망으로 생각하며 북학론을 주장하였다. 이덕무는 평등견을 바탕으로 청과 조선은 구분되지만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하였따. 그러나 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등 모순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나) 중국은 은의 유입과 대외무역의 발전을 통해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무렵에 인구 증가로 인하여 여러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위기가 본격화되지 않았으며 소수의 지식인들이 개혁방안을 모색하거나 부정적 측면을 염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