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피쿠로스는 고대 그리스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두려움에 떨며 행복에 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행복의 실현을 위해 이러한 두려움을 자연학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이신론적 관점과 원자의 우연적인 운동을 통해 우주의 필연성을 부정함으로써 행복이 인간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 실현된다고 보았다. 또한 영혼이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며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후 심판을 부정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였다. 그는 인간 스스로가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길을 제시하고 이를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2.
첨단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제로 남겨져 있는 생명체의 존재 이유와 원리는 자연물의 구성요소를 탐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서 출발하였다. 그는 물질론과 이에서 파생된 환원론을 부정하면서, 모든 자연물은 목적 지향적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자연물이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내재적 본성과 이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타고났으며, 이는 반드시 실현되어 언제나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3.
비트켄슈타인은 철학적 논란의 원인으로 언어의 명확하지 못한 사용을 지적하고 이를 ‘그림 이론’을 통해 명료화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언어와 세계가 대응하는 것처럼 각각을 구성하는 명제와 사태 또한 대응한다고 보았다. 그는 언어가 세계에 실재하는 것들을 지시하기에 의미가 있는 것과 같이,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사태와 대응하여 경험적 세계에 다루고 있으며 진위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감각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것들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던 기존의 철학적 논란들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명제가 되므로 의미 없는 말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4.
신채호는 조선 민족을 이루는 역사적 주체의식과 제국주의에 대응하여 생긴 국가정신과의 조화를 이룬 ‘신국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조선민족이 신국민이 될 때 민족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대항하는 동양주의는 조선 민족의 주체적 생존이 어렵다고 보며, 조선 민족 중 일본과 동화되지 않는 자들과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일본 민중과 연대하여 서구 열강에 대해 투쟁하고자 하였다. 그는 조선 민중이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속에서 일본과 이에 동화된 자들이 휘두르는 정당하지 못한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며 인류가 인류를 억압하지 않는 자유 속에서 서구열강과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다.
5.
율곡은 만물을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인 이와 끊임없이 변동하는 물질인 기와의 조화를 통해 만물을 설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전개된 수기를 위한 수양론 중 하나인 이통기국은, 천도와 합일되는 경지에 도달한 성인과 일반인의 기질에 차이는 있지만, 동일한 이를 갖기 때문에 일반인 또한 수양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키면 천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인간을 넘어 사회의 폐단을 제거하여 천도를 실현하려는 경세론과도 이어지는데, 이이는 이를 통해 이인 왕도 즉 어진 정치를 위해 기인 법제의 변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법제개혁론을 통해 이인 대전 즉 조종 성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하는 폐단이 있는 법령들을 고쳐야 함을 주장하며 직접 수기치인을 실천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6.
유입된 서학 일부의 우수성을 인정하며 심주지각설을 주장한 이익과 달리, 최한기는 ‘몸기계’라는 개념을 통해 기계론적 신체관을 인정하였다. 그는 기계적 운동이 외부적 원인이 아닌 자발적 원인으로 보며, 이에 대한 최초 원인을 유동적이며 형체가 없는 ‘신기’로 규정하였다. 그는 경험을 통해 신기가 지각 내용을 기억으로 저장하고 이를 통해 종합과 확장 곧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주장한 신기의 중심에 있는 심이 지각 활동을 담당한다는 심주지각설은 그 결합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서양의학을 독자적으로 연결지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7.
(가) 과거제는 능력을 중시하는 합리성을 갖추며 익명성을 확보하고 명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통해 공정성 또한 확보하는 시험제도이다. 이와 더불어 과거제는 다수에게 사회적 지위의 이동가능성을 보장함으로써 사회적 유동성에 기여하며, 교육에 대한 동기를 고취시켜 교육의 확대와 지식의 보급에 기여하며, 도덕적 가치기준에 대한 광범위한 공유를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비록 경쟁의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를 위해 국가는 통과하지 못한 자들에게 특권을 줌으로써 이를 완화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러한 우수성을 인정받안 서양에서도 도입됐다.
(나) 과거제는 뛰어난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체의 문제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합격을 위해 형식적인 학습이 주가 되었고, 많은 인재들이 장기간 수험생활로 재능을 낭비하게 되었다. 과거제의 근간이 된 능력주의적 태도는 시험뿐만 아니라 관리의 업무에도 적용되어 지역사회를 위한 정책보다는 개인의 성과를 위한 단기적인 결과만 중시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학습 능력 이외의 인성이나 실무능력을 평가할 수 없어 익명성의 문제점과 더불어 문제점에 대한 논의 일어나며 이를 지위세습이나 벽소와 같은 봉건적 요소로 보완하고자 하는 복고적인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8.
(가) 18C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다. 박제가는 절대적 중화론적 관점에서 청을 조선의 지향점으로 삼으며, 조선의 독자성을 우선시하기보다는 이가 합치되는 방향을 추구하였다. 명과의 의리 문제에 대해 그는 이미 오래된 일이며, 지켜야할 의리보다는 얻는 이익이 크다며 이용후생의 태도를 취했다. 이와 달리 이덕무는 청의 제도가 민생과 무관한 점이 있다며 이를 비판하였으나, 청 문물의 효용성을 무시하지 않는 이용후생의 태도와 더불어 평등견의 관점에서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나)
18세기의 청은 대외무역의 발전과 이로 인한 은의 유입을 통해 이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인한 전통적 사회적 유대의 약화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결사조직의 결성을 야기하였다. 또한 인구 증가로 교육받은 지식인이 늘어났지만,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관료조직 규모의 정체로 인해 부정부패가 심해졌다. 서양과의 교류로 이러한 기류가 더욱 심해지자, 그들은 개방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취하기도 하였으나 위기가 본격화 되지 않는 상황에서 소수만이 문제를 제기할 뿐이였다.
*나머지 부분이 복붙이 안된걸 뒤늦게 확인했는데,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다시 올립니다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