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인해 신이나 신이 야기하는 일에 두려움을 가졌고,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며 자연학을 통해 인간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에피쿠로스는 우주들 사이의 중간 세계에 사는 신은 불사하는 존재로 최고로 행복한 상태이며 고통, 분노, 호의로부터 자유롭고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도 인간 자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았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 모두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과 육체는 상호작용하는데 이는 곧 육체가 소멸될 때 영혼도 소멸된다는 뜻이므로, 인간은 사후세계를 두려워할 필요 없고, 이는 죽음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없애준다.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은 우주와 인간의 세계에 대한 비결정론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우주는 우연의 산물임을 의미하고 인간이 필연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자유 의지를 가지게 한다. 에피쿠로스는 이를 토대로 자유로운 삶의 근본을 규명하였으며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바탕으로 영혼이 안정된 상태에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이 내재적 본성에 따라 목적을 추구하며, 목적을 실현할 능력을 타고나기에 방해받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현하며 이 목적의 달성은 항상 운동 주체에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근대에 접어들어 모든 사물이 생명력을 갖지 않는 일종의 기계라는 견해가 강조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갈릴레이, 베이컨, 스피노자는 목적론이 인간 이외의 자연물도 이성을 갖는 것으로 의인화했다고 비판했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이성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근대 사상가들의 과학적 모형에 기초한 기계론적 모형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는 교조적 믿음에 의존한 비판은 볼로틴과 우드필드와 같은 현대 학자들에게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물의 물질적 구성 요소를 알면 그것의 본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자연물이 단순히 물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의 본성이 단순히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생명체의 존재 원리와 이유에 대한 탐구는 아직 진행 중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이러한 탐구의 출발점이다.
3.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는 논리실증주의를 비롯한 20세기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철학적 논란들이 언어의 애매한 사용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하여 명료화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보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에서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그림이론'을 주장했는데, 언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언어가 세계와 대응하기 때문이며 명제와 사태가 대응하듯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는 동일하고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명제에 대응하는 사태는 사실이 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며 의미있는 명제는 실제하는 대상이나 사태 즉 경험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명제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의미없는 명제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 영혼, 형이상학적 주체, 윤리적 가치 등과 관련된 논의가 의미없는 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우리 삶에 드러나지만 말로 답변하거나 설명할 수 없기에 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역사가 신채호는 역시를 아와 비아의 투쟁과정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여기서 투쟁은 연대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요소이다. 아는 자기 본위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주체인 동시에 항상 나와 상대하고 있는 비아와 마주선 주체를 의미하며 아의 자성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고유성을 유지하려는 항성과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적응하려는 변성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어서 아는 항성을 통해 자신에 대해 자각하고 변성을 통해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의식을 갖게 된다. 아는 개별화된 개인적 아인 소아와 국가와 사회 차원의 아인 대아로 구별되는데, 소아는 자아만을, 대아는 자아와 시간적 차원에서 아의 생명력이 지속되는 상속성, 공간적인 차원에서 아의 영향력이 파급되는 보편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상속성과 보편성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이 둘은 항성과 변성의 조화를 통해 실현된다. 신채호는 조선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신국민이 되어야 하며 신국민은 대아로 역사적 주체 의식을 갖는 항성과 비아인 제국주의 국가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국가 정신이라는 변성을 가지고 있고, 동양주의는 비아와 아가 동양으로 통합되는 것이므로 반대했다. 아 속의 비아인 일본의 동화된 자들과 비아 속의 아인 조선 민중과 행동할 수 있는 비아가 존재하며 비아 속의 아와의 연대를 강조하며 인류로서 인류를 억업하지 않는 자유를 지향했다.
5. 유학은 수기치인을 통해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인데, 율곡이이는 유학의 이념을 적극 수용하여 수기치인의 도리를 밝힌 성학집요를 발표하여 이땅에 유학의 이상 사회가 구현되기를 바랐다. 율곡의 수기를 위한 수양론과 치인을 위한 경세론의 바탕이 되는 것은 만물을 이와 기로 설명하는 이기론으로, 이는 형체도 없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존재하는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 기는 시간적인 선후와 공간적인 시작과 끝을 가지며 끊임없이 변화하며 작동하는 물질적 요소이다. 이와 기는 구별되면서도 항상 공존한다. 수양론 중 하나인 이통기국론은 만물이 동일한 이를 공유한다고 주장하고 이는 기질의 정화로 일반인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기질 변화론으로 이어지며 수양의 방법으로 거경, 궁리, 역행을 제시한다. 율곡은 이라고 할 수 있는 왕도나 오륜이 아닌 법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록에 수록된 수교들 중에서도 여러번의 적용을 통해 검증된 것들이 대전에 올라가는데, 이는 조선의 기본 법전이 되었고, 조종 성헌이라 여기며 어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율곡은 이인 조종성헌이 아닌 조종성헌에 해당하지 않는 기를 바꾸면서 조종성헌을 회복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고 믿었다.
6. 17세기 초부터 서학 서적에 담긴 서양의 과학 지식은 지식인들의 사상 변화를 이끌었는데, 19세기 중반까지는 서양 의학의 영향력이 천문, 지리 지식에 비해 약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서양 의학의 대변동을 이끈 근대 해부학 및 생리학이나 그에 따른 기계론적 인체관이 아닌 로마시대의 생리설, 중세의 해부지식이 실린 주제군징 속 다소 한정적인 서양 의학 지식을 접한 뒤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으나 여전히 심주지각설을 고수하였다. 이후 미미하던 서양 의학의 영향력을 키운 것이 19세기 철학자 최한기였는데, 당대 최신 의학 성과를 담은 홉슨의 책을 접한 후 인체의 지각적, 생리적 기능에 주목하였다. 최한기의 인체관은 '몸기계'로 함축하며 인체는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자발적인 운동을 한다고 보았는데, 기독교적 세계관을 부정하였기에 신체 운동의 원인을 신기로 규정하였다. 최한기는 뇌의 역할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뇌주지각설을 부정하고 심주지각설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 심주지각설에서 심을 과거에는 심장에서 본 것과 달리 최한기는 심을 신기의 중심으로 보았으며 신기가 균형을 이루어져야만 생명에 관련된 활동이나 지각이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신기는 감각 기관을 통한 경험을 통해 지각 활동을 하고 개별 감각 기관을 통해 얻게 된 감각을 통합하며 사유를 통해 지각 내용을 조정함으로써 온갖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정합적인 체계를 이루고자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7. 과거제는 능력주의적인 시험으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는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지위 획득의 기회를 줌으로써 개방성을 제고하여 사회적 유동성을 증대시켰고, 익명성은 공정성을 강화하였다. 과거제는 학습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여 지식인 집단의 확대라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고전과 유교경전이 주가 되는 학습 내용은 도덕적인 가치 기준에 대한 광범위한 공유로 이어졌다. 과거제가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동질적인 엘리트층의 연속성을 가져오며 관료 선발 과정과 곤료제에 기초한 통치의 안정성에 기여하였다. 과거제가 정치적인 합리성을 띈다는 유럽 계몽사상가들의 견해로 이는 서양의 사회 제도에 도입되기도 하였다.
17세기 무렵 중국에서는 어느 정도는 세습과 같은 봉건적인 요소를 다시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는데, 고염무는 지방의 관리에 대해서만 세습을 허용하는 방안을 제시했고, 황종희는 벽소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개혁론은 사실 이전부터 논의가 되어왔는데, 치열한 경쟁은 형식적 학습과 재능 낭비를 초래하였으며 인성이나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 익명성도 반발을 일으켰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과거제는 관리의 업무 평가 방식에도 영향을 미쳐서 관리들은 눈에 바로 보이고 빠른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 정책만을 추진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통해 선출된 관리들이 자신의 출세만을 지향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은 과거제의 단점들을 봉건적 요소의 도입으로 보완하고자 하였다.
8. 중화관념이 청의 현실에 대한 인식에 각각 다르게 반영되면서 북학파들 개인의 북학론은 학문적 성향이나 관심에 따라 달랐다. 박제가는 청의 현실을 특정 관점에 따라 선택 및 추상화하여 조선이 지향해야 할 가치 기준으로 제시하였는데, 당시 중화 관념의 절대성을 인정하며 중화와 합치는 방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그의 북학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명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견해가 청이 천하를 차지한지 백여년이 지나면 없어질 것이라며 청 문물제도의 수용이 가져다 주는 이익을 역설하였고 이는 실용적인 입장으로 이익 추구에 부정적이었던 주자학자들과 구분된다. 이덕무는 박제가와 달리 객관적인 태도로 기록하고자노력하였고 스스로를 평등견이라 부르며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뿐만 아니라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고, 청과 조선은 구분되지만 배타적이지 않기에 조선 풍토에 맞게 살아가면서 청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이용후생에 관심을 보였으며 평등견에 어긋나는 모습도 보였다.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명대 이래의 경제 발전이 정점에 달해 국내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역 품목이 사치품에서 일상용품까지 확대되었고, 상인 조직이 발전하였으며 신용 기관이 확대되었는데, 이는 외부적으로 대외 무역이 발전하고 은의 유입이 증가한 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은을 매개로 한 과세와 은과 상품의 세계적 순환은 중국 경제와 세계 경제를 긴밀히 연결 시켰다. 그러나 19세기 무렵 청의 변영은 지속되지 않고 급속도로 하락하며 18세기 후반에도 위기의 징후들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민간의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문제들로는 부정부패의 영향을 받은 인구의 증가로 인한 활발한 결사 조직 구성과 교육받은 지성인의 증가를 수용하지 못하는 관료조직의 크기 등이 있었다. 불안함을 느낀 통치자들은 백성들과 서양의 교류를 끊으려 했다. 북학파들이 여행했던 18세기 무렵에도 이러한 문제들이 존재했으나 본격적이진 않았기에 일부의 지식인들만이 걱정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