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등록
k00130 2021-01-01 오후 6:04:30

[1]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했다. 에피쿠로스는 신은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바탕으로 행복은 인간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영혼과 육체는 모두 입자로 구성되었으며 육체가 죽으면 영혼 또한 소멸하기에 사후 신에 의한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원자의 운동이 우연적인 것처럼 신 또한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러한 생각이 인간의 자유의지 실현에 매우 중요하다.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신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중심으로 에피쿠로스는 윤리학을 이끌어간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며, 목적 실현은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목적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갈릴레이, 베이컨, 스피노자는 각각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볼로틴, 우드필드는 다시 근거를 들며 목적론의 타당성에 대해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적 구성만으로 본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엠페도클레스를 반박하며 자연물이 단순히 물질적 구성이 아니며 본성이 단순히 물리, 화학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는 현대에도 하고 있는 생명의 존재원리와 이유를 탐구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3]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언어를 명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가 세계에 대응하므로 '그림 이론'을 통해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의미 있는 명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 직접 언급해야 하며, 그것이 참이어야한다. 만약 반대가 된다면 '의미 없는 명제'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 질문들은 모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4] 신채호는 오로지 투쟁만을 역설한 강경론자로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사상에서 핵심인 '아'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투쟁과 연대가 모순되지 않는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와 '비아'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아'의 자성은 항성과 변성으로 나뉘며 항성을 통해 자신의 고유성을 자각하고 변성을 통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신채호는 '아'를 다시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였는데, 소아는 자성은 잊지만 상속성과 보편성을 가지지 못하는 반면 대아는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는 항성이 크고 변성이 작거나 항성이 작고 변성이 큰 경우 모두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아의 개념을 통해 동양주의에 반대하고 비아에 동화된 자들을 제외한 민중을 제국주의에 함께 저항할 수 있는 주체로 보았다.

[5] 율곡 이이는 '이'와 '기'를 바탕으로 한 '수기'와 '치인'을 통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로, '기'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만물은 하나의 같은 '이'를 공유하지만, 다양한 '기'의 성질로 인해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성인과 일반인은 동일한 '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질을 정화하면 선한 본성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율곡 이이는 법제 개혁론을 펼쳤는데, '이'의 영역에 해당하는 대전과는 달리 법제는 '기'에 해당했기 때문에 성종 이후 연산군 때 만들어진 법령 중 백성의 삶을 힘들게 하는 법제를 개혁해야만 조종성헌이 회복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대전은 수교와 록을 거쳐 만들어지는데, 대전에 오른 규정들은 '이'의 영역에 해당하며 개정되지 않았다.

[6] 당시 의학자들도 관심없던 서양 의학에 이익은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아담 샬의 영향을 받아 몸의 운동은 뇌가 주관하며 지각 활동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전통적인 심주지각설을 주장하였따. 이후 최한기는 홉슨의 영향을 받아 이전 유학자들은 도덕적 차원에 초점을 두었다면, 그는 지각적, 생리적 기능에 주목하여 '몸기계'라는 인체관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체는 '신기'를 통해 신체 운동을 한다고 보며 뇌가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뇌주지각설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심'이 지각 운용을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주장했다. 심주지각설의 '심'은 심장이 아니라 신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며, 이러한 신기는 태어날때 만들어지며 죽을때 사라지는 유동성을 지니며, 균형을 이루어야 생명 활동과 지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최한기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맹신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체계를 만들고자 했던 점에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7] (가) 동아시아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과거제는 비교적 공정한 제도로 관료들을 선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거제는 학습에 강력한 동기를 주어 교육의 확대에 기여했고,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여러 특권을 주며 과한 경쟁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비록 왕조가 교체할지라도, 모두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동질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제의 장점을 알아본 유럽 국가들은 시험을 통한 경쟁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나) 유형원, 고염무, 황종희 등의 학자들은 학습 능력 외의 인성이나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 등의 과거제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론을 주장했다. 과거제의 부작용으로는 공동체 의식의 약화, 개인적 동기와 공공성의 상충, 결과주의적, 능력주의적 생각 등이 있었다. 따라서 봉건주의적 요소의 도입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합리적인 제도가 가지고 온 역설적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8] (가) 박제가와 이덕무를 통해 같은 북학론을 주장하더라도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청의 현실을 조선이 지향할 가치 기준으로 여기며 객관적이기보다는 특정 관점에서 서술한 박제가와 달리 이덕무는 객관적인 태도로 청의 현실을 서술하였다. 반대로 박제가와 이덕무는 청 문물의 효용을 인정하여 이익 추구를 인정하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으로 인해 경제적 번영을 했지만 19세기에 접어들자 인구 증가로 인한 심각한 위기를 직면하였다. 이로 인해 사회적 유대가 약화된 사람들은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일이 잦아졌는데, 이러한 결사조직은 반란의 기반이 되기도 하고,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종종 불법적인 행위들도 나타났다. 통치자들은 이런 모습에 불안을 느끼며 외국과의 접촉을 차단하려고 했는데, 이 때문에 청은 18세기 후반에 비로소 무역 개방이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k00387 2021-01-01 오후 5:57:50
  1.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했다그는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주장해 행복이 인간 자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았다또한 인간의 미세한 입자로 구성이 되기 때문에 사후에 소멸하여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우주가 우연적인 운동을 하는 원자로구성되었고 우주와 인간 세계에 신에 관여는 없기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는다고 주장했다에피쿠로스는 인간이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살아갈  있는 길을 제시하고 행복을 실현할 방법인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제시하였다.  


  1.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이 목적을 추구하는 본성을 타고나며외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본성에 따른 운동을 한다는 목적론을 주장한다그의 주장은 인간 이외의 자연물도 이성을 갖는 것으로 의인화한다는 비판을 받는다이러한 비판은 자연에 목적이 없을 보이지 못했고 시도조차 하지 않아 목적론의 옳고 그름을 확인할  없기 때문에 부적절하다아리스토텔레스는 물질론과 환원론에 반대했다그의 목적론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생명체의 존재 원리와 이유를 정확히 규명하는 탐구의 출발점이다
  2. 비트겐슈타인은 많은 철학적 논란들이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해 발생한다고 보아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하여 명료화는 것을 중요시했다그는 그림 이론에서 언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언어가 세계와 대응하고 언어가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또한어떤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 되기 위해서는 명제가 실재하는 대상이나사태에 대해 언급해야하며그것에 대해서는 거짓을 따질  있다고 주장한다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철학자들이 다루었던 논의는 의미가 없으며 형이상헉적 문제와 관련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드러나지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3.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과정이라 정의하는 동시에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중 간의 연대를 지향하기도했다아란 자기 본위에서 자신을 자각하는 주체이며 비아와 마주  주체를 의미하고 아의 자성은 항성과 변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는 아를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여 소아는 개인적 아로 상속성과 보편성을 갖지 못하며대아는국가와 사회 차원의 아로 상속성과 보편성을 가질  있다고 말한다또한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여 조선민족의 근대적 대아인 신국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서구 열강에 대항하자는 동양주의를 조선민족인 아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보아 반대했다신채호는 조선 민중을 참된 민족 생존과 번영을 달성할  있고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부당한 폭력과 억압을 강제하는 제국주의에 함께 저항할  있는 주체로 보았다
  4. 유학은 수기치인을 통해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으로율곡은 이기론을 바탕으로 수기를 위한 수양론과 치인을 위한경세론을 전개한다그는 수양론의  가지 기반으로만물이 하나의 동일한 ‘ 공유하지만 다양한 ‘ 성질로 인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있다는 이통기국을 주장하고이것은 기질 변화론으로기질 변화론은 경세론으로 이어진다또한율곡은 ‘ 구현할  있도록 법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반면, ‘대전이라는 법전은 여러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완성되고조종성헌이라 불리는데, <경국대전> 그런 절차를 거친 것으로 조선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규정들이 개정되지 않았고국왕이라도 그것을 어길 수는 없었다따라서 율곡의 법제 개혁론은조종성헌을 변혁하자는 것이 아닌폐단이 있는 여러 법령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5. 17세기 초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은 사상의 변화를 이끌었지만 이에 대해 논평을 남인 인물은 제한적이었는데실학자 이익은 <서국의>에서 서양 의학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였지만 심주지각설을 고수하였다이익 이후에도 서양 의학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19세기 실학자 최한기는 인체의 지각생리적 기능에 주목해 문제의식을 본격화하였다최한기는 인체를 일종의 기계인 ‘몸기계 형상화하면서도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자발적인 운동을 한다고 보았는데그는 인체를 구성하는 신기를 신체운동의 원인으로 규정하여 기계적 운동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려 했다그는 홉슨의 뇌주지각설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그것은 완전한 체계를 이루기에 불충분하다고 보아 심주지각설이  유용하다고 주장하였다또한그는 신기가 감각 기관을 통한지각 활동에 의해 외부 세계의 장보를 받아들여 기억으로 저장한다고 파악하였는데이러한 최한기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맹신하지 않고 개념의 접합을 통해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조선 사상가에서 주목할 만한 성취이다
  6. (과거제는 능력주의적인 시험으로 시험 성적 자체가 더욱 중요해졌다이것은 응시 자격에 일부 제한이 있었다하더라도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고사회적 유동성 역시 증대시켰다 결과 지식인 집단이 폭넓게 형성되었으며 도덕적인 가치 기준에 대한 광범위한 공유를 이끌어냈다과거제는 동질적인 엘리트층의 연속성을 가져와 사회적 안정에 기여했다장기간 유지된 과거제는 유럽에 전해져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사상적 동향과 실질적인 사회 제도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제의 문제점에 따른 개혁론이 등장했다형식적 학습재능 낭비학습 능력 이외 부분 평가 불가능과 같은 문제로 과거제를 개선하라는 압력이 이어졌다또한과거제의 부작용에 따른 관리들의 활동의 한계가 드러났다봉건적 요소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소속감과 충성심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 (북학론에는 차이가 있었는데박제가톼 이덕무의 연행록에서도 이러한 차이를   있다박제가는 중화와 합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했고 이덕마는 청과 조선의 현실적 차이와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 18세기 후반 중국은 국내 교역이 활발히 일어났는데은과 상품의 세계적 순환으로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연결되었다그러나 청은 부정부패사회적 유대 약화상호 주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직 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통치자들도 이를 느껴 무역 개방을 축소하고 일부 지식인들만이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k00424 2021-01-01 오후 5:53:57

1. 에피쿠로스는 신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보고 자연학을 바탕으로 인간이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사상을 제시하였다. 어피쿠로스는 이신론적 관점을 통해 인간은 신이 아닌 자신에 의해 행복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죽으면 육체와 함께 영혼도 사라지므로 죽어서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 인간의 삶에서 우연히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인간은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에피쿠로스는 최종적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쾌락주의적 윤리학을 제시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장연물에 목적을 추구하려는 본성과 이를 실현할 능력이 내재되어 있고 목적을 추구한 결과는 항상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자연물에 대한 기계론적 입장을 가지는 근대 학자들에게 자연물도 이성을 갖는 것으로 인간과 같은 취급을 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에 대해 목적론을 반박하고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목적론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근대 과학은 물질론에서 환원론으로 이어지며 생명체를 물리적, 화학적 법칙으로 설명하려하였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대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물의 존재원리와 이유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이라는 의의가 있다.

3. 비트켄슈타인은 철학에서의 언어를 분명하게 하는 것을 그의 과제로 삼았다. 그는 '그림 이론을 통해 언어가 세계에 대응하며 언어를 구상하는 '명제'와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도 대응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사태는 사실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사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며 명제가 존재하는 대상이나 사태를 다룬다면 참 거짓을 판명할 수 있는 의미있는 경우가 되고 존재하지 않는 사태를 다룬다면 참 거짓을 판명할 수 없는 의미없는 명제가 된다. 비트켄슈타인은 기존의 관념적이고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철학적 내용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하며 이들에 대해 침묵할 것을 주장한다.

4. 신채호는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엿지만 민중간의 연대를 지향하기도 했고 이는 그의 핵심 사상인 '아'를 통해 잘 드러난다. 아는 자기자신을 자각하는 모든 사람이 갖는다는 점과 비아와의 관계에서 생성된다는 점에서 상대성을 지니며 아의 자성은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하려는 항성과 환경변화에 적으하려는 변성의 특징을 가진다. 또한 아는 개인적 차원의 소아와 국가적 차원의 대아로 나뉘는데, 소아와 대아 모두 자성을 갖지만 상속성과 보편성은 대아만 갖는다. 상속성은 시간이 흘러도 아의 생명력이 유지되는 것을 뜻하고 보편성은 아의 영향력이 퍼지는 것을 뜻하며 둘은 상호 연결의 관계를 가진다. 신채호는 아의 개념을 사용해 동양주의에 반대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중이 연대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5. 율곡 이이는 천도와 합일하고 성인이 되기 위한 수기치인의 도리를 밝혀 유교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했다. 율곡은 수기와 치인을 위해 가각 수양론과 경세론을 펼치는데 둘은 이기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와 '기'는 다른 성질을 가졌지만 함께 존재하며 만물은 같은 이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다른 기에 의해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다. 다라서 성인이 되기 위해 잘못된 기질을 정화하여 이를 회복하여야하고 율곡은 수양방법을 제시한다. 율곡의 법제개혁론은 왕도나 오륜같은 이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법제를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에서 법령은 수교의 형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오랫동안 유용하고 빠르게 시행되면 '록'을 거쳐 '대전'에 실린다.

6. 조선에서 서양의 의학사상을 받아들이고 이에 대한 생각을 남긴 사람은 드물지만 이익은 아담 샬의 [주제군징]을 수용하여 뇌가 신체의 운동을 주관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였지만 지각활동도 뇌가 주관한다는 아담 샬과 달리 심장이 지각활동을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믿었다. 이익 후에도 조선에서의 서양의학의 영향력은 크지않았는데 국가의 정책, 낮은 파급력 등의 원인이 있다. 최한기는 홉슨의 [전체신론]을 일부 수용하여 인체를 하나의 기계로 파악하면서도 '신기'의 개념을 사용해 인체 내부의 자발적인 운동을 운동의 최초원인으로 보았다. 또한 심주지각설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며 인체를 돌아다니며 지각활동을 주관하는 신기와 그 중심의 작용을 설명했다. 이는 서양의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주체적으로 이론을 정립하려한 성과이다.

7.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선발제도인 과거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과거제는 사회적 지위상승의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학고 학습을 촉진하는 등 다양한 긍정적인 사회적 효과를 불러왔고 정치적 안정성에도 기여하였으며 이는 유럽에도 전파되어 실시되었다. 그러나 과거제의 부작용을 보완하려는 방법으로 세습등의 과거 요소를 도입하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었다. 과거제가 학습의 깊이를 형성하지 못하고 학습외에 다른 능력을 평가할수 없으며 과거제로 선발된 관리 역시 단기적인 결과만을 추구하고 소속감과 충성심이 낮다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전의 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과거제로 인한 역설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8. 박제가의 [북학의]와 이덕무의 [입연기]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18세기 청에 대한 인식은 학자의 관심 영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박제가는 청을 절대적으로 생각하여 청을 지향하며 이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덕무는 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한편 청문물의 유용함을 언급하며 조선과 청의 가치를 모두 인정했다. 18세기 후반 청은 대외 무역 활성화로 은이 많아지면서 시장확대 등 다양한 경제발전이 일어났다. 하지만 19세기 초기 인구증가 및 도시로의 이주로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일어났고 위기가 예측되었다.

k00137 2021-01-01 오후 5:48:36
1.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신을 두려워 하였으나 에프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주장하며 신은 모든 고통과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세계는 신이 아닌 인간 자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보았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마찬가지로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은 여러 근거에 따라 우주와 인간 세계의 비결정론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신은 우주와 인간의 세계에 관여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 이것을 인간의 자유 의지의 단초로 삼는다. 결론적으로 에피쿠로스는 윤리학을 통해 인간이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함으로써 인생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으로 이끌었고 특히, 쾌락주의적 윤리학으로는 행복 실현 추구 방안까지 제시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을 제시하며 자연물이 목적을 갖는 것 뿐만 아니라 목적을 실현할 능력도 타고난다고 믿으며 "자연은 헛된 일을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근대에 들어 인간 외에 자연물도 이성을 갖는 것으로 의인화 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이성을 지난다고 생각하였다. 현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할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근대 사상가 볼로틴, 우드필드 등을 비판하고 지적하였다. 17세기의 과학에서는  모든 것이 물질로 구성된다는 물질론에서 나아가 환원론으로까지 이어졌다. 환원론은 물질론 가운데 일부의 모든 생물학적 과정은 물리, 화학적 법칙으로 설명되며 살아있는 생명체와 죽은 물질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를 함축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하며 물질론과 환원론을 비판한다. 생명체의 존재 원리와 이유를 정학히 규명하는 과제는 첨단과학의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진행 중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와 목적론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탐구의 출발점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3. 철학적 논란들은 언어를 애매하게 사용하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언어를 명료화하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삼은 비트켄슈타인은 '빈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와 20세기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논리 철학 논고>라는 책에서 '그림 이론'을 통해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함으로써 의미를 가지고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가 동일함을 주장한다. '그림 이론'에서는 '사태'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의미하므로 어떠한 명제가 '의미 있는 명제'가 되 위해서는 실재하는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언급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의미 없는 명제'가 되며 이것은 참과 거짓을 따질 수 없기 때문에 경험적 세계에 대해 언급하는 명제만이 의미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 경험 가능하지 않은 대상인 신, 영혼 등과 관련된 문제의 논의는 의미가 없고 말로 설명하거나 답할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말하였다.

4. 역사가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는데,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강경론자처럼 비춰지기도 하였지만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중 간의 연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에서 투쟁과 연대는 모순되지 않는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항상 나와 상대하고 있는 존재인 비아와 마주 선 주체인 아는 자신을 자각하는 누구나 될 수 있다는 상대성과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아가 생성된다는 상대성을 동시에 지닌다. 신채호는 아의 자성은 항성과 변성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항성을 통해 자각을, 변성을 통해 비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의식을 갖게 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그는 아를 소아와 대아로 구별하여 소아는 자성을 갖지만 상속성과 보편성을 갖지 못하고, 대아는 자성, 상속성, 보편성을 모두 가질 수 있으며 상속성과 보편성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대아가 자성을 자각한 이후에는 항성과 변성의 조화를 통해 상속성과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아의 개념을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상속성과 보편성을 지닌 대아인 신국민을 제시하였고 비아인 일본이 아가 되어 동양을 통합하는 동양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아 속에 비아'와 '비아 속의 아'가 있음을 밝히며 민중 연대를 통해 '인류로서 인류를 억압하지 않는'자유를 지향했다.

5. 유학은 수기치인을 통해 천도와 합일되는 경지인 성인이 되고자 하고 이를 적극 수용한 율곡 이이는 성학집요를 통해 수기치인의 도리를 밝히고 수기를 위한 수양론과 치인을 위한 경세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인 '이'와 물직적 요소인 '기'를 바탕으로 이기론을 주장하고 '이'와 '기'의 서로 구별되지만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를 이기지묘라 표현하였다. 율곡은 이통기국을 주장하며 만물이 동일한 '이'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기질 변화론으로까지 나아갔고 거경, 궁리, 역행을 기질 변화를 위한 중요한 수양 방법으로 제시하며 그의 수양론은 사회의 폐단을 제거하여 천도를 실현하려는 경세론으로까지 이어졌다. 율곡은 <만언봉사>를 통해 법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대전에 실린 규정은 '조종성헌'으로 받아들여져 그것을 어길 수 있는 사람이 없지만 그는 폐단이 잇는 법령들은 바꾸어야 오히려 조종성헌이 회복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이기론을 통한 노력은 수기치인의 실천으로 볼 수 있다.

6. 17세기 초부터 서학 서적은 조선의 지식인들의 사상의 변화를 이끌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서양 의학 서적의 영향력은 미미했던 가운데 실학자 이익은 로마시대의 생리설, 중세의 해부 지식이 실린 <주제군징>을 일부 채록하여 서양 의학 지식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며 심주지각설을 고수하였다. 이 이후에도 서양 의학의 필요성은 거의 없었지만 19세기 최한기로 인해 서양 의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본격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인체와 신가를 결부하여 이해한 결과로 나온  '몸기계' 개념을 통해 기계적 운동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원인을 찾고자 한다. 그는 신경계 그림을 접함으로써 뇌주지각설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심주지각설이 더 유용하다고 주장하였지만 이 마저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심'을 심장이 아닌 신기의 '심'으로 파악하여 신기가 균형을 이루어야 생명 활동과 지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스스로 지각 내용 조정, 적응하여 세계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서양 의학과 신개 개념을 통한 한기의 인체관은 서양 의학을 맹신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조선 사상사의 주목할 만한 성취라고 평가할 수 있다.

7. (가) 과거제는 능력주의적인 시험으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음으로써 성적이 더욱 중요시되고 공정성을 바탕으로 사회적 지위 획득의 기회가 개방되었으며 사회적 유동성 또한 증가시켰다. 과거제는 비교적 공정한 제도였으며 교육의 확대, 지식의 보급 등 여러 사회적 효과를 가져와 지식인 집단이 폭넓게 형성되었고 국가는 불통과자들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여 경쟁적 선발제도의 부작용을 완하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동아시아 역사상 이 과거제가 천 년이 넘게 시행된 것으로 보아 과거제의 합리성과 사회적 안정에 대한 기여도를 알 수 있다. 과거제에서 엘리트 층이 선발되는 연속성은 통치의 안정성에도 기여하였으며 과거제는  당시 선교사들을 통해 일본, 유럽에까지 전해져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러한 관심으로 인해  관료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시험을 통한 경쟁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나) 공거제는 능력주의, 결과주의적 인재 선발의 약점과 신분 세습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시행된 제도로 조선 후기 관료 선발 제도 개혁론의 대표적 제도로 형식적 학습, 많은 인재의 재능 낭비, 인성과 실무 능력 평가 불가 등 과거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등장하게 되었다. 개혁론은 과거제로 임용된 관리들은 공동체 의식이 약화 되고 출세 지향적이었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이 약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봉건적 요소를 도입하고자 한 것으로 이는 단순히 복고적인 것이 아닌 과거제의 부작용을 보완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8. (가) 18세기 북학파들은 북학론을 구체화하였고 북학론도 개인의 성향과 곤심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는데 그 중 박제가는 북학이라는 목적의식이 강했으며 조선은 청의 현실을 지향해야할 가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중화 관념의 절대성을 인정하며 조선의 독자성 유지 보다는 중화 와의 합치를 중요시 생각하였고 양반도 이익을 추구하자는 실용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덕무는 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며 청에 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청과 조선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고 둘은 서로 구분되면서도 배타적이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등 자신의 인식 태도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나) 18세기 후반 중국은 경제 발전으로 국내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장거리 교역 상품이 사치품뿐만 아니라 일상적 물건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이러한 중국의 경제적 번영은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청의 번영은 급격한 인구 증가로 19세기 무렵부터 급속히 하락하였으며  인구 증가로 인한 이주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도 전통적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는 등 사람들끼리의 상호 부조 관계를 맺는 결사 조직이 성행하였고 이는 불법적인 활동으로까지 연결되었다. 청은 18세기 후반부터 이미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었고 통치자들도 불안을 느끼고 있어 서양에 대한 무역 개방을 축소하기도 하였지만 위기가 본격화 되지 않아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염려와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k00334 2021-01-01 오후 5:47:44
k00138 2021-01-01 오후 5:12:04
k00010 2021-01-01 오후 1:14:26

[1]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진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한 에피쿠로스는 자연학을 바탕으로 한 사상을 주장했다. 그는 신은 인간의 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신론을 주장하며 인간의 행복은 신이 아닌 인간 자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영혼과 육체는 죽은 뒤 모두 사라지기에 사후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는 우주의 모든 부분에서 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없고 모두 우연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인간 스스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2]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은 반드시 실현될 어떤 목적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도 타고나 그것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자연물은 생명력이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근대적 견해를 바탕으로 갈릴레이, 베이컨, 스피노자 등의 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목적론에서 자연물까지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보고 있다며 비판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성을 지닌다고 생각했기에 그들의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블로틴, 우드필드 등 일부 현대 학자들은 근대 사상가들의 비판에 있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기계론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만을 내세웠다고 비판한다. 17세기 근대 과학의 경향은 물질론과 환원론으로 계승되었고, 자연물의 본성에 대해 엠페도클레스의 견해를 반박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생명체의 존재 원리나 이유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3] 언어의 문제를 철학의 과제로 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그림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언어가 세계에 실재하는 것들을 지시하고, 언어와 세계, 명제는 사태에 대응한다고 보며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가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태가 사실이 아닌 논리적 가능성을 의미하고, 이때 실재하는 대상이나 사태에 관한 명제만이 의미 있고 경험적 세계를 벗어난 것을 다루는 명제는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경험할 수 없는 신, 형이상학적 주체, 윤리적 가치 등에 대한 논의는 의미가 없고 이러한 것들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4]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가 투쟁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함과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에서 이를 반대하는 민중이 서로 연대해야함을 강조하며 투쟁과 연대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이라 보았다. 그의 사상에서 '아'는 자성을 가진 존재로, 자기 자신을 인식함과 동시에 비아와 마주 보고 있는 주체인데, 이때 자성은 '나의 나됨'을 의미하며 이는 고유한 성질을 유지하려는 항성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는 변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를 그는 개별적인 '소아'와 국가,사회적 차원의 아인 '대아'로 나누었는데, 이 둘은 모두 자성을 가졌지만 대아는 소아와 달리 상속성과 보편성 또한 가진다 보았다. 투쟁과 연대는 모순되지 않다고 생각한 신채호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 민족은 상속성과 보편성, 즉 항성과 변성을 모두 갖춘 신국민이 되어 조선 민족의 고유성을 잃지 않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비아인 일본과 아인 조선 민족이 통합됨을 주장하는 동양주의를 비판하며 '비아 속의 아', 즉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중과 조선 민족이 연대해 인류가 인류를 억압하지 않는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율곡은 수양론을 통해 수기를, 경세론을 통해 치인을 이룬다면 천도와 하나가 되는 경지인 성인이 된다고 보았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불면하는 만물의 법칙인 '이'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인 '기'로 세계를 설명하는 이기론이 있었고, 이 둘의 관계를 분리되지 않는 '이기지묘'라 말했다. 그는 수양론의 한 기반으로 모든 사물들은 똑같은 이를 가지면서 서로 다른 기를 가진다는 이통기국을 주장하며 누구나 본성인 '이'를 되찾을 수 있다는 기질 변화론으로 확장시켰다. 율곡은 더 나아가 사회를 바로잡는 경세론을 주장하며 법제 개혁론을 주장했는데, 그는 '이'에 해당하는 왕도나 오륜을 이루기 위해 '기'에 해당하는 '법제'를 바꿔야 한다고 보았다. 즉, 그는 조정성헌이 아닌 연산군 이후 제정된 조세 법령 등의 법령을 개혁해 조종성헌을 회복시켜 이상적인 사회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6] 서양 의학이 조선에 유입이 적었던 18세기에 이익은 생리설, 중세의 해부 지식이 실린 아담 샬의 '주제군장'을 읽고 이에 대한 논평을 남겼다. 그는 내용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부분 수용하였지만 뇌가 몸의 운동가 지각활동을 주관한다는 아담 샬의 설명에 대해 뇌의 운동과는 달리 지각 활동은 심장이 주관한다는 심주지각설을 고수하였다. 이후 서양 의학 지식은 내용이 불충분하다는 점, 정책적으로 금지되었던 점, 내용 자체가 충분히 충격적이지 않다는 점, 서양 해부학이 야기한 윤리적 문제 등을 이유로 조선 사회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그러던 중 19세기 실학자 최한기는 사람의 몸을 지각이나 생리적 기능 중심으로 바라보았다. '몸기계'라는 그의 인체관은 홉슨의 '전체신론' 등의 저서를 통해 강화되었고, 기계적 운동론의 무한소급을 해결하기 위해 신기를 운동의 최초 원인으로 상정했고 이를 형체 없이 몸속을 돌아다니며 몸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기는 개별 감각들을 통합해 이를 자율적 사유를 통해 조정하여 작용에 적응해 많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보는 최한기의 인체관과 그의 시도는 서양 의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7] (가) 동아시아 시회에서 유지된 과거제는 정기적이고 공개적이며 능력주의적인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제도로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다. 공정성을 바탕으로한 과거제는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개방성을 높여 사회적 유동성을 증대시켰다. 또한 교육의 확대와 지시의 보급에 기여해 지식인 집단이 광범위하게 형성됐고 시험을 위한 학습의 내용은 도덕적 가치 기준에 대한 공유를 이끌었다. 합리성에 기초한 과거제를 통해 선발된 관료층이 가지는 동질적인 연속성은 관료 선발의 안정성과 통치의 안정성에 기여했고, 이는 서양의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져 유럽에서도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게 되었다.

(나) 조선 후기 유형원은 능력주의적 인재 선발의 한계인 신분적 세습의 문제점을 의식해 이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로 공거제를 주장했고 고염무, 황종희 등 중국에서는 관료 선발에서 봉건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회복시키려는 개혁론이 등장했다. 개혁론의 등장은 치열한 경쟁은 형식적 학습을 야기했고, 많은 인재들은 오랜 수험 생활로 재능을 낭비했으며 인성이나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없는 과거제의 특성 등 과거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바탕이 되었다. 이는 가시적, 단시적 결과만을 중시하고 소속감이 낮으며 출세 지향적인 임용된 관리들의 활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연결되었다. 개혁론은 과거제로는 소속감과 충성심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바탕으로 합리성이 야기한 역설적 상황을 역사적 경험과 사상적 자원을 통해 보완하려는 시도였다. 

[8] (가) 18세기 북학파들은 청의 문물제도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하였지만 개인마다 주목한 영역이 서로 달랐기에 그들의 북학론도 차이를 보였다. 이는 함께 청을 방문한 박제가와 이덕무의 연행록에서 확인되는데, 이 둘은 물질적 삶을 중시하며 청 문물의 효용을 중시했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차이를 보였다. 박제가는 북학이라는 목적의식이 강했기에 청의 현실은 조선이 추구해야할 기준이 되는 것이었고, 이에 그 당시의 조선은 중국과 같아져야 한다는 생각했다. 반면 이덕무는 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했고 청과 조선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아 두 나라 모두가 가진 가치를 인정해 조선의 풍토에 맞게 살면서도 청의 문물을 도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나) 18세기 후반의 중국은 경제 발전이 정점에 이르렀는데 국내 교역과 상인 조직의 발전과 신용 기관의 확대는 교역의 질과 양이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대외 무역의 발전과 은의 유입은 중국의 경제적 발전에 영향을 준 외부적 요인이었고, 은의 순환으로 인해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며 중국은 경제적 위기를 직면하였다.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했고 사회적 유대가 약화된 사람들로 결성된 결사 조직은 반란의 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인맥을 바탕으로 관료들은 많은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경쟁의 심화는 종종 불법적인 행위로 연결되는 등 화려한 발전 뒤에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요소들이 존재했다. 

k00364 2021-01-01 오전 11:3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