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등록
k00390 2021-01-01 오전 8:50:16
k00132 2020-12-31 오후 5:42:03
k00132 2020-12-31 오후 5:42:00
k90448 2020-12-30 오후 8:00:21

에피쿠로스는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은 인간에게 신은 존재하지만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 관점을 주장하고 영혼 또한 육체와 마찬가지로 미세한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어 사후세계에서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세계는 우연이 일어났다는 생각을 필연성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유의지의 단초로 삼았다. 그는 인간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상을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물이 목적을 추구하는 본성을 타고나며 내재적 본성에  따른 운동을 한다는 목적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근대 사상가들은 비과학적이라며 목적론을 비판한다. 그에 반해 일부 현대 학자들은 오히려 근대 사상가들이 그런한 주장이 충분한 근거를 갖지 못했다고 역으로 비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기 과학적 설명을 요구하는 물질론과 환원론에 대해 반박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물이 존재하고 운동하는 운리와 이유에 대한 탐구의 출발점이라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비트겐 슈타인은 철학적 논란들이 명료하지 않은 언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 이러한 철학적 논란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를 구성하는 명제들과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들이 각각 대응단다는 '그림이론'을 주장했다. 사태는 사실이 아니라 사실이 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이기 떄문에 이에 대응하는 언어는 사실적 그림이 아닌 논리적 그리미다. 그렇기 떄문에 경험적 세계에서 언급하는 명제만이 '의미있는 명제'가 된다. 따라서 비트겐 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의 '아'에 대한 사상은 투쟁과 연대가 모순되지 않는 요소였다. 그는 아의 자성이 항성과 변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두 요소의 조화를 통해 상속성과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동양주의는 일본이 아가 되기 때문에 조선 민족인 아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채호는 반대했다. 신채호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중과 식민지 민중의 연대를 지향했는데 이는  조선민중인 아와 일본인 비아 속의 아와 연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연대를 통해 신채호는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했다.


율곡은 수기치인을 위한 수양론과 경세론을 전개하는데 이에 바탕이 되는 것은 이기론이다. 율곡은 이를 만물의 법칙이자 원리로 보았고 기는 물질적 요소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는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존재하며 설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됨이 없는데 이러한 것을 이기지묘라고 표현했다. 율곡은 이통기국을 통해 모든 사람은 동일한 이를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기를 가지고 있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성인과 일반인에 관계없이 누구든 기질을 정화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기질 변화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이에 해당되는 법안 들은 지속적인 적용을 거치면서 대전이라는 법전에 오르게 되고 이는 조종성헌으로 받아들여졌다.


19세기 중반까지 서양 의학은 천문 지리 지식에 충격적인 내용이 없었고 유입된 내용도 부족하고 윤리적 문제나 정책적으로 서양의 학문이 배제를 당했기 때문에 일부학자들을 제외한 학자들이 서야의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일부학자 중 이익은 아담샬의 주제군징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되 심주지가설은 고수하였다. 또 다른 학자 최한기는 홉슨의 책들을 접하고 인체는 복잡한 기계와 장치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지고 자발적이 운동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신체운동의 원인을 최한기는 신기에서 찾아냈다. 신기는 몸과 함께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으로 형체가 없이 두루 돌아다니는 것이며 이 신기가 균형을 이루어야 생명 활동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과거제는 능력주의적인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장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고거제가 계속되면서 생기는 단점들이 있었는데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깊이 있는 학습이 아닌 형식적이 학습을 조성했고 장기간 동안 수험생활에 매달리면서 재능이 낭비되는 현상도 일어났다. 또, 실무능력을 평가할 수 없어 전에 장점으로 뽑혔던 익명성이 회의되었다. 관리들은 빠른 승진, 즉 개인적 동기가 공공성과 상충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러한 단점들로 인해 세습과 같은 봉건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도입하고자 하는 방안이 나타났다. 


18세기 북학파들은 청에 다녀온 경험을 연행록으로 기록했는데 개개인이 주목한 학문의 영역이 달라 북한론도 차이를 보였다. 박제가는 청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박제가와 달리 이덕문은 청의 문물을 수용하되 양쪽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며 조선의 풍토에 맞추어 주체적으로 수용하자는 의견을 펼쳤다. 18세기 후반 중국의 과도한 인구의 증가로 인해 번영 속에서 반란이나 부정부패와 같은 면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청 또한 백성들을 차단하거나 무역개방을 축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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