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이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 위해 자연학을 주장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신들은 인간과는 다른 셰계에 살고 있다는 이신론을 주장했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죽고 나면 모두 사라지기 때문에 신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은 세게의 만물은 우연적인 운동이고 우주또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유로운 삶의 근본에 대해 탐구하고 행복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윤리학을 주장했다.
2. 이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주장하였고 자연은 목적을 스스로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대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과학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그 이후 일부 현대학자들은 근대학자들이 목적론을 비판할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고 주장했고 목적론의 참, 거짓도 판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는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생명체의 존재 원리나 이유를 탐구하려는 노력의 출발점이다.
3.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언어를 불분명하게 사용하여 논란이 생긴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림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이론을 통해 언어도 세계와 대응함으로 모형이라고 주장하였다.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는 동일하고 언어의 명제는 사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사태는 논리적으로 사실이 될 가능성을 의미한다. 사태에 대응하는 명제는 참이 될 수도, 거짓이 될 수도 있다.
4. 신채호는 투쟁만이 아닌 연대 또한 독립을 위해서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에서 '아'는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주체이고 '비아'는 동시에 '아'와 마주보고 있는 존재이다. 그는 '아'는 자성을 가진 존재이고 외부환경에 순응하는 성질이 가지고 있다고 말해다. '아'를 대아와 소아로 구분하여 소아, 대아 모두 자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상속성과 보편성은 대아만의 특징이라고 역설한다. 이 개념을 통해 그는 조선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환경변화에 맞춰 조선 민족이 고유성을 잃지 말고 비아속의 아와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율곡의 법제개혁은 이와 기로 설명되는 이기론에 바탕을 둔다. 이와 기는 서로 다른 성질을 갖지만 현실세계에서는 항상 함께 있으며 서로 분리되지 않고 존재한다. 이통기국론은 동일한 '이'를 갖지만 기질상의 병폐를 제거함으로서 일반인도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율곡은 이기론을 법제개력론에도 적용하는데 삼강오륜, 왕도, 어진 정치 등은 이에 해당하는 것들이며 개혁대상이 아니고, 기에 해당하는 법제는 개혁대상이라고 말한다. 율곡은 폐단이 있는 법령들을 개혁해 나가야 조종성현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6. 서양의학의 전파로 인해 새로운 지식을 접한 이익은 서양의학을 일부 수용하였다. 이익은 신체운동을 주관하는 곳은 뇌라는 점은 받아들였지만 지각활동을 하는 곳은 심장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였다. 후대에 최한기는 기존의 삼주지각설에서 심을 신기라고 주장하며 신기는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성을 지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신기는 감각을 통합하고 지각한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의 다양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최한기는 서양의학을 자신만의 개념인 신기와 연관지으면서 새로운 의학사상을 정립하였다.
7. 동아시아 사회에서 과거제가 오랫동안 존속했던 이유는 과거제는 공정성, 합리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조선사회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과거제는 시간이 지날 수록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조선, 중국 모두 이런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논의를 해왔다. 왜냐하면 과거제의 시험방식은 수많은 부작용을 초래하였고, 장기간 수험생활에 매달려 재능을 낭비하는 현상도 일어나게 되었기때문이다. 또한 관리들의 실무능력을 파악하기 어려웠고 관리들은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부족해 단기적이고 장기적인 성과만을 중요시하는 문제점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과거제도가 낳은 역설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8. 북한론을 주장한 북학파들은 각각 약간씩 다른 주장을 펼쳤다. 박제가는 청의 현실은 조선이 추구해야 할 이상향이고, 조선의 독자생을 유지하기 보다는 청의 문물제도를 도입하면서 청과 같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이덕무는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이용후생의 삶을 중요시 여기기도 했지만 청과 조선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선의 풍토에 맞게 살아가되 청의 문물을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이후 청은 은의 유입으로 인해 경제가 매우 발전하게 되면서 세계의 경제가 밀접해져 갔다. 그러나 청의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해 전통적인 유대감이 약화되었고 반란을 꾸미는 결사조직이 생겨나고, 관료사회의 부정부패 또한 심화되어 점점 위기를 맞게 되었다.